[인천뉴스=강명수 기자] 12일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 후보군이 발표된 가운데 박찬종 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의 이름이 올라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안상수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장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박찬종 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비롯해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 김성원 자유한국당 의원, 이용구 자유한국당 당무감사위원장,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등 5명이 후보군에 올랐음을 발표했다.

안 위원장은 “후보군은 당 소속 의원과 원외당협위원장, 대국민 공모를 통해 추천 받은 150여명 후보 중에서 당내 최종 회의를 거쳐 반영한 결과”라고 전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박찬종 이사장이 정치권에 이름을 올린 건 실로 오랜만이다. 1939년 김해 생인 박 이사장은 검사 출신으로 1973년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부산시 서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해 신민당 김영삼 후보와 동반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입성했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고, 이후 1979년 10.26 이후 공화당을 혁신하자는 정풍운동을 주도하며 정치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중 유신 정권에 가담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내며 정치적으로 전향했다.

1985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한 신한민주당의 창당준비위원이 됐으며, 그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한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동참한다. 그러나 양김의 갈등이 심화되자 통일민주당을 탈당한다.

13대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을 떠나 서울시 서초구 갑 선거구에 출마, 연거푸 당선됐다. 특히 13대 선거에서는 무소속, 14대 선거에서는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해 당선되면서 정치권의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예고하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7%대의 지지율(4위)로 야권의 강력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이때의 남양유업의 신제품 우유 ‘다우’의 광고모델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때 남양우유에서 내세운 슬로건 ‘무균질 우유’에 빗대 ‘무균질 정치인’으로 자신을 홍보한 것이 매우 유명하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초반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여론조사 1위를 달렸으나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의 암묵적인 지원을 얻은 조순 후보에게 석패하고 말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해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1997년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했지만 당내 기반이 취약한 탓에 중도에 경선을 포기하고 탈당했다. 그 후 국민신당에 입당했고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서울 서초갑에 출마했지만 8.7%의 득표율로 4위에 그쳤다.

2000년에는 민주국민당의 창당에 참여, 부산시 중구-동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2002년에는 이회창 후보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지원했지만 이회창의 낙선으로 정계 복귀가 쉽지 않게 됐다.

그 뒤로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BBK 주가조작 사건’, ‘판사 석궁 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동방신기 노예계약 사건’, ‘주한일본대사습격사건’ 등을 담당해 언론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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