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동아일보 1926.11.13.]

홍호는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작곡가 홍난파의 숙부이기도 하다. 그는 1920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곧장 수원 삼일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홍난파의 부친 홍순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로 천거 받아 정동 14번지 외인주택 경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홍호는 1916년 남양 보흥학교 과정을 마치고,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하였다.

홍호는 형 홍순의 집에서 배재고보를 다녔다. 그리고 평소 따르고 있던 배재고보 한문교사 김진호가 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는 정동제일교회에 참석하였다. 따라서 조카 홍난파도 정동제일교회에서 서양음악을 처음 접하고 독학으로 찬송가의 독보법을 익히며 천부의 음악 소양을 꽃피웠다고 한다.(세계일보 1998.5.5. ‘봉선화 작곡가 홍난파’)

1919년 3.1 만세운동 때는 홍호는 교사 김진호에게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 이필주의 지원을 받아 예배당 파이프 올겐 뒤에서 영문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러시아, 영국, 미국 영사관으로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홍호는 기소 중지로 석방되었고, 곧바로 복학하여 1920년 4월 배재고보(3회)를 졸업하였다.

곧바로 수원 삼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수원 독립운동가 임면수, 김세환 등 7명이 세운 민족 학교였다.

1920년 김진호선생님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정동제일교회 내 사택에서 몸 회복을 하던 중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목사가 직접 찾아와 인천내리교회 긴박한 사정을 알리고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인천내리교회는 1919년까지 김영섭전도사의 탁월한 실력과 리더십으로 엡웟청년회를 173명의 회원이 될 정도로 성장시켜 교회 중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기선 감리사의 3.1운동에 대한 미온적 태도로 인천지역 감리교회는 수원, 화성, 해주, 강화 등 타 지역의 감리교회에 비해 만세운동을 주동하거나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들은 불만을 품고 교회를 이탈하였다. 1920년 내리 의법청년회원이 46명으로 급감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청년회장을 겸임하면서 의법청년회를 회복하고자 했던 김영섭목사가 갑자기 미국유학을 결정함에 따라 오기선 감리사는 새 담임목회자를 물색한 것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김진호전도사를 청빙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를 떠난 민족의식이 강한 교인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민족교회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된 것이다.

김진호목사는 내리 의법청년회를 이끌 인재를 데리고 왔는데 그가 바로 홍호이다. 홍호는 은사 김진호의 부름에 삼일학교 교사를 즉시 사임하고 인천 영화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홍호는 화성 사강읍 독립운동가 예종구, 강화군 길상면 독립운동가 송의근 등이 영화학교 교사로 합류하면서 강한 민족의식을 심어주었고, 그들이 인천 지역사회 청년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내리의법청년회 조직을 복원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1922년 회원수는 311명이 되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고, 1920년대 초 인천 청년운동의 절대적 위상을 갖게 하는 동시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하였다.

배재고보 학생 기독전도단을 조직한 바 있는 김진호목사의 뜻을 따라 홍호는 전국 최초로 인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 하는 인천배재학우회(인배회)를 조직하였다. 홍호는 회장 및 임원을 맡으면서 음악회, 웅변대회, 강연회 등을 주도하였으며,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인천지역 각종 운동경기에도 참여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또한 인천 최초의 웅변대회를 개초하도록 하여 청년단체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민족 울분을 토로하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하였다.

1922년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김진호목사가 배재고보 교목실장으로 옮겨 갔지만 홍호는 인천에 계속 있으면서 내리의법청년회 회장, 인배회 회장 및 임원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영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배재고보 은사 김진호의 맏딸 김신영과 결혼하여 맏사위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1933년 동아일보 기자가 되어 함북 지방 주재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다시 서울로 와 정동제일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 김신영은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재원으로 후에 정동제일교회 전도사, 장로가 되었다.

▲ [동아일보1933.7.7.]

홍호는 3.1만세 운동 시 배재고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보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생활을 치룬 독립운동가이며, 1920년대 영화학교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실천한 교육자로, 내리의법청년회와 인배회의 임원 활동을 통해 인천 청년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