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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똥이야기] 개항직후 인천의 분뇨 제도

기사승인 2019.05.14  09: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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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공동변소-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1883년 제물포가 개항할 당시 영국영사관(현 파라다이스호텔) 아래 해안에 조선인 가옥이 10호 정도 밖에 없는 한가한 어촌이었다. 성창포(현 만석동) 포구에는 객주와 어민들의 가옥이 있었다. 뒷간에 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당시 어촌과 동일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할 뿐이다.

강(냇가)이나 바다 부근 뒷간은 물 위에 돌을 쌓거나 나무 기둥을 세워 똥을 누면 그대로 물에 씻겨 내려가도록 하였다. (이재호; 변소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오물도 이런 식으로 해결하였다. 거주하는 인구가 많지 않아 강이나 바다를 오염시키지는 않았다. 오물도 동일한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똥바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갯벌 위에 나무기둥을 박고 발판을 놓아 그 위에서 똥을 눕게 되면 곧바로 갯벌에 떨어져 있다가 만조 때 똥이 둥둥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되면서 인천으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은 야마구치, 후쿠오카, 효고현, 나가사키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인천 정착 초기부터 일본에서 정착된 청소규칙을 그대로 따랐다.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위생과 소독을 최우선으로 간주해 영사관이나 거류민단의 협조를 얻어 청소규정을 제정해 이를 시행했다.(김상은; 일제하 도시청소행정의 전개와 변화)

그해 12월 「인천항 일본거류지 가규칙」을 제정해 ‘가옥은 기와집 혹은 아연판 지붕 등을 쓰고 초가 지붕, 나무 지붕 등의 자연물 재료를 써서는 안 된다. 단, 택지 내 하수 물받이 및 화장실 분뇨 저장통 등은 단단한 것을 써서 오수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청소규칙을 구체화하였다.(손정목; 한국 개항기 도시 사회경제사연구)

1888년 12월 「인천항 일본거류지 가규칙」에서 “오물, 진애 등과 같은 심한 냄새가 나는 물통은 모두 거류지 밖 진애투기장에 버릴 것, 택지 내라 할지라도 이를 쌓아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제정하고 이를 어겼을 때는 과태료를 부과하였다. 청국기계나 각국공동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였다.

1890년 7월에는 일본 거류민 각 호의 진개 제거, 분뇨 수거, 도로 청소를 임무로 하는 위생사를 설치하고 매월 호 당 10전 씩 납부하도록 하였다.

1895년에는 청소규칙이 더 강화되어 일본 거류민들은 영사관 직권으로 청소규칙을 위반했을 때 십원 이내의 벌금 또는 구류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인천부사, p.1421)

일본 거류민단은 위생조합을 설립해 분뇨 처리를 해결하였다. 분뇨장수들이 오물 수거 및 반출 과정에서 수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이권사업이기 때문에 직접 나서서 운영하였다. 특히 1895년 마스다 야요시는 가로수 살수와 청소사업을 도맡아 운영하게 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마스다 야요시의 위생회사는 일본인 거류지, 청국인 거류지 그리고 각국 거류지까지 분뇨 수거 및 처분할 수 있었다. 위생회사를 통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제재조치를 가해졌다. 마스다 야요시는 분뇨 수거할 때 비용을 받고 분뇨처리 과정에서 거름을 판매하기 때문에 수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손경옥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손경옥 기자 press@incheonnews.com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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