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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길 작가의 '짜장면'

기사승인 2019.07.17  16: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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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개항되어 어느 도시보다 일찍 근대화된 인천에는 전국 최초나 최고가 50여 가지나 된다. 그 중에는 최초의 교회와 등대, 성냥공장, 서구식 공원, 호텔, 초등학교, 극장 등을 꼽을 수가 있고 담배 생산과 쫄면 탄생지도 있다. 특히 1905년 최초의 짜장면을 만들었던 공화춘 건물이 지금은 짜장면 박물관이 되어 그 역사를 오롯이 전하고 있다.

우리 대중음식 중 남녀노소가 좋아하고 빈부격차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만 한 게 있을까. 더구나 춘장에 찍어먹는 단무지나 양파 몇 조각만 있어도 한 끼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니 국민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인천역에서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언덕에는 세월의 두께를 고스란히 이고 있는 청관건물이 연이어 있고 이젤을 펼쳐놓은 미술학도들이 꿈을 스케치하던 모습이 아련하다. 그 거리 한편에 흰색과 빛바랜 연둣빛 타일이 붙어있는 낮은 2층 건물은 전형적인 중국음식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옛 생각을 절로 나게 한다.

주렴(珠簾)을 들추고 들어가면 짜장 볶음과 양파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주방을 향해 주문을 외쳐대는 투박한 주인목소리가 들려 오는듯하다.

 

내 어릴 적 중국집은 대개 그랬다.

나무젓가락을 쪼개 양손바닥으로 비벼 가지런히 놓고 엽차 한 모금 마시노라면 주방에선 탕, 탕 국수 뽑는 소리가 들리고 단무지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허기를 달랜다.

지금은 국수를 순식간에 기계로 눌러 뽑지만 그때만 해도 밀가루 반죽을 양팔로 벌리고 늘리는 수타면으로 뽑아내니 그 순간마저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이윽고 상 위에 오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짜장면을 공손히 먹으며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중학시절 악동 친구 몇 명과 작당하여 짜장면을 먹고는 한둘씩 빠져나가다 붙잡혀 가방을 잡히곤 다음날 찾으러 갔던 일, 운동하고 오던 날은 시장기가 더해 곱빼기를 먹고도 성이 안차, 옆집에서 또 한 그릇 뚝딱 먹어 치우던 왕성한 식욕이었다.

 

짜장면은 개항과 더불어 중국 산동지방 화교들이 인천에 자리 잡으며 소개된 것으로 전해진다. 항구에서 일하던 노동자(쿠리)들이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시초가 되었고 그것이 어느덧 면발처럼 긴 100년의 역사를 지니며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대중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1970년대 정부의 분식장려 덕분에 전성기를 맞았다. 학교 졸업식이나 생일날엔 으레 설렘 속에 중국집엘 갔었고 짜장면에 탕수육 한 접시 더 시키면 족했다. 달콤한 소스에 폭신폭신하고 쫄깃한 쇠고기튀김 맛이란 과연 일품이었다.

짜장 소스에는 양파와 감자, 돼지고기가 들어갔고 어느 집은 감자대신 무와 양배추를 넣기도 했는데 검은 소스 위에 채 썬 오이와 완두콩 몇 알 더 올려주면 그것도 신선한 별미였다.

젊은 시절, 근무처 인근의 중국집에서 외상전표로 한 달 내 먹고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외상값을 받으러 오던 예쁜 딸이 있었고 통마늘(산톨) 한통을 은근히 서비스하던 인정 많던 주인아저씨, 그 시절 점심요기는 대개 짜장면이었다.

때론 짜장면을 먹으며 배갈(고량주) 한도쿠리(작은 세잔 용량)를 곁들였고 한손에 짜장 그릇을 들고 바둑을 두거나 당구장에서 큐대를 잡고, 서서 먹던 그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신포동 진흥각의 삼선짜장과 옛 한전 뒤 신성루의 유니짜장, 주안사거리 진흥관의 매콤한 사천짜장은 지금도 잊지 못할 갈색 추억이다. 석바위 연중반점의 구레나룻 허연 화교 할아버지네와 상호는 잊었지만 율목동 옛 인고 담 밑의 이층집도 유명한 짜장면 집이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도록 각인되어 있는 동네 문화반점의 짜장볶음 냄새는 항상 나를 유혹하던 마법의 향기였다.

이웃에 살다 소박맞고 떠난 근석이네 아줌마가 오면 어머니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을 맞잡고 눈물, 콧물 찍으며 신세한탄을 하곤 했다. 그리곤 대개 짜장면을 시켜오도록 내게 시켰다. 전화기가 없던 시절, 나는 나무 배달통을 들은 아저씨를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배달통에는 내 몫도 들어있으니 어른들의 눈물어린 사연일랑 아랑곳없이 그저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언젠가 중학입시에 떨어진 나를 해병대에서 막 제대한 삼촌이 데려 간곳은 내동사거리 어느 중국집 이층, 거기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려를 들으며 눈물 속에 먹던 짜장면, 그 숙부도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내가 보아온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음식점이나 꽈배기튀김집이 아니면 시 외곽에서 부지런히 농사짓던 농부들이었다. 고깔 같은 모자를 쓰고 온종일 부지런하게 흙을 고르던 모습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고 몇 안 되는 중국음식점만 남은듯하다. 부동산을 취득할 수 없었던 화교들이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아 부인명의로 건물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 이런 저런 이유로 대만으로 많이들 떠나는 것을 보았다.

이미 짜장면은 메뉴만 중국음식이지 내국인에 의해 우리입맛에 맞는 우리음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프로그램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짜장 소스에 한 주걱씩 퍼 넣는 하얀 색깔의 조미료와 기준치 이상 들어가는 식용유가 도마 위에 오른 거다. 나이 들며 기름기를 제한해야 하는 입장에다 인공조미료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그게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모든 중국집에서 그런 게 아니라 안심은 됐지만 거부감 없는 조리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인이 배겨서 그런지 간혹 그립고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중국집 앞을 지날 때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 요즘도 가끔 짜장면을 먹곤 한다.

 

이제 중국음식점이 있던 자리에는 화려한 패스트푸드점과 일식집이 들어서고 있다. 웰빙을 찾는 요즘세대에 밀려 튀기고 볶는 중국집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멀어져만 가는 것 같다. 더구나 간편해진 라면한테 국민선호도 1위까지 빼앗긴 마당에 흑백사진처럼 추억도 아스라이 잿빛으로 변하고 있다.

짜장면 한 그릇에 깊게 새겨진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지만 역사는 흘러도 음식은 남는다. 음식의 유전자는 이처럼 끈질기고 생명력이 강해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 이제 짜장면과 함께 한세대가 가고 또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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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press@incheonnews.com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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