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래포구 출처 인천경제

오래전에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자문관의 저온창고 방문안내를 맡은 적이 있다.

점심으론 일식집에서 장어덮밥(돔부리)을 먹었는데 공깃밥 위에 구운 장어 세 토막을 올린 간단한 것이었다.

자문관은 독일인으로 일본에서 교수로 지냈던 경험 탓인지 젓가락질을 잘했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듯 천천히 조금씩 들면서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고 답하다보니 두 시간쯤 걸린 듯싶다. 그러나 나는 늘 하던 대로 공깃밥을 순식간에 비우곤 민망하고 무료하여 연신 보리차만 홀짝이는데도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 시절은 군 출신 엘리트들이 집권하여 경제를 빨리빨리 부흥시켜 가난과 배고픔을 벗어나자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때문에 사회전반에 흐르는 분위기와 사고방식도 그런 시류에 젖어있어 내 식습관도 부지불식간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식사를 끝낸 자문관은 통역자와 자기 식대만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챙겼다 소위 ‘더치페이’라고나 할까 익숙지 않던 나는 순간 당황했으나 그분은 태연했다. 지금 생각 해도 그것이 그의 일상적 가치관이었는지 혹은 서양인 특유의 우월감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장어는 뱀같이 생겼다고 뱀장어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민물장어(우나기)를 뱀장어라 하고 바닷장어는 붕장어(아나고)라고 한다.

뱀장어는 사계절 보양식품으로 남성의 스테미너식으로 알아주지만 한방에서는 여성에게 더 좋은 영약으로 권하고 있다.

비타민 A가 많아 시력을 향상시키고 동맥경화, 노인성치매를 예방하는 DHA와 함께 하혈(下血), 대하(帶下)에 효험이 있으며 회춘에 좋은 항산화 비타민도 풍부하다.

어느 해인가 임진강에서 잡은 누런 자연산 두 마리를 어렵사리 구하여 참기름 두른 솥에 넣고 가열하는데 힘차게 튀어 올라 온 바닥을 기름범벅 한 적이 있다. 소위 용봉탕을 만들 참인데 역시 놀라운 힘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고대 이집트 왕들은 수백 명의 궁녀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일 강 유역의 장어를 정력제로 애용해왔다. 그러나 과도하게 오래 섭취하여 비타민 A과잉에 따른 골다공증으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왕들의 ‘미이라’ 탄소치를 측정하여 오늘날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라고나 할까.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옛말을 되새겨야 할 일이다.

장어는 바다가 고향이다.

장어의 대표격인 뱀장어는 가을에 살찌고 맛이 좋다. 가을에는 산란을 위해 연어와는 반대로 바다로 향한다. 이때 몸 안에 각종 영양분을 축적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산란지까지 헤엄쳐가는 동안 살아남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뱀장어는 태평양 괌 서쪽 수심 4천 미터의 깊은 바다로 산란여행을 떠나는데 장장 3천Km나 떨어진 머나먼 곳이다. 한동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북한의 위성발사로켓이 날아가다 떨어진 거리만큼 되니 어떻게 그 먼 바닷속 대장정을 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알에서 갓 태어난 새끼는 댓잎장어라고 부르는데 서쪽으로 흐르는 북적도 해류를 따라 움직이다 필리핀근처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쿠로시오해류(黑潮)를 갈아타고 우리나라 남해와 서해에 이른다.

산란과 탈바꿈은 추측일 뿐, 댓잎장어에서 실뱀장어로 변하는 과정을 본 사람은 없다. 어디로 해서 그 먼 남쪽바다로 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산란 장소에서 댓잎장어를 발견하는 것을 근거로 추정하며 몸속에 자기장을 느끼는 나침반 같은 것이 있어 찾아간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이것을 어미가 살던 곳을 찾는 모천회귀 또는 태어나 자란 곳을 찾아가는 성육회유라고 한다. 고향을 그리는 것은 본능적으로 사람이나 미물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봄이면 인천 앞바다의 소래갯골과 한강하류인 강화도와 세어도 연안에는 실뱀장어 잡이 소형어선이 수십 척씩 몰려든다.

봄 한철 이만한 고소득이 없으니 좁은 물길에서 경쟁도 치열하다. 잠자리채같이 고운 그물로 뼈가 훤히 보이는 약한 놈을 잡아 붓으로 분류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살려 양어장에 공급하거나 일본과 대만에 수출도 한다. 양어장에서는 5센티미터도 안 되는 놈을 잡아다 기르는 것일 뿐 인공산란과 부화를 통한 완전양식은 할 수가 없다.

실뱀장어 1킬로그램은 3천여 마리 분량이고 비쌀 때는 2천만 원까지 호가하니 귀하디 귀한 놈이라 하겠다.

며칠 전 고향 동리에서 인쇄 겸 도장포를 하는 오군한테 전화가 왔다. 어릴 적 단짝 동무인 김 군이 왔는데 만나고 싶다기에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옛집은 구도심에 그대로 있었지만 재개발 예정 지구라 많이 낡아 있었다.

도로 확장으로 담장과 대문은 뒤로 들어앉았고 녹슨 대문은 추억을 간직한 채 굳게 닫혀있다.

감회가 새롭다.

장가들며 분가하여 떠난 지 사십 여년의 세월, 허름한 블록담장과 오래된 기와지붕, 빛바랜 연두색 대문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유년시절 자치기와 비석놀이, 구슬과 딱지치기를 하던 도로는 이제 보니 골목길 같은데 그때는 참 넓었다. 건너다보이는 학교 운동장도 대단했는데 어린이 놀이터 같다.

노년에 접어든 지금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진 탓일까, 기억과 현실 속에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입학식 도중 몰래 돌아와 놀이에 빠져있던 골목길, 그 어귀에 서니 숨차게 뛰어오시던 할머니 모습이 선하다.

그 어른 떠나신지 수십 년, 양친마저 여윈지 십 수 년, 눈을 감으니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던 옛시조처럼 형제들과 아는 이 모두 뿔뿔이 떠나 고 바람 불면 외등 갓이 흔들리던 전봇대만 그대로 서있다.

세월이 흐르면 변치 않는 것이 없으련만 나이 먹을수록 심약해지는 것일까. 내가 어버이 되어 자식을 길러보니 깨닫는가? 애틋한 마음이 가슴을 적신다.

장어는 태어나 어미가 살던 강(母川)을 찾아가고 또다시 목숨을 걸고 어미의 바다(母海)로 돌아가건만 이제사 나그네처럼 떠돌다 싸한 마음을 안고 이곳에 왔다.

태를 묻고 강보에 싸여 마른자리 차지하던 곳, 자식걱정에 평생을 애태우시던 어머님…. 장어는 그 먼 길마다 않고 찾아가건만 어머님 체취마저 삭아버린 허당의 세월….

고향을 버린 것은 어머니를 잃은 것이요, 생명의 닫침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노모가 좋아하시던 반중조홍(盤中早紅)감을 품은 박인로처럼 지금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서러워할 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유년으로 돌아가 옛집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대문 열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반가움으로 감싸주시던 젊고 뽀얀 엄마와 주름살이 가득한 노모가 오버랩 되며 환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먼 옛날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

따스한 온기가 퍼지며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그러던 잠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며 언제 도착할지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어미의 바다를 찾은 장어마냥 푸근한 숨 한 번 내쉬고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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